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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왕로(2006-07-11 11:35:01, Hit : 11167, Vote : 2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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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관악계의 대부 이재옥선생



  2002년 8월 28일은 우리나라 관악기 역사의 근대화를 이루었던 이재옥 선생님이 세상을떠나신 날이다.선생님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우리나라의 관악기 근대사와 윈드오케스트라의 역사를 살펴 보았다. 韓國藝術總集의 音樂篇Ⅲ 공로음악가의 예술세계와 삶에 한상우 선생님이 이재옥선생님의 일대기를 집필하셨으므로 이를 소개한다.

  음악계의 선구자들이 음악에 입문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기독교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할 수 있게 된 경우가 가장많다.두번째는 음악을 만날 수 있는 큰 도시에서 성장한경우인데 이재옥 선생님의 성장과 특히 음악에 입문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위의 예와 전혀 다른 것을 발견하게된다.다시말해 이재옥 선생님은 음악의 불모지에서 완전히 자신의 음악적 욕구와 의지에 의해 음악의 문을 두드렸고 그의 타고난 음악적 기질은 많은 악기에 통달함으로써 한국음악계에서는 아주 독특한 길을 걸었다 하겠다.이재옥 선생님의 전공을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 지 언뜻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는데 그는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관악기를 부전공으로 택해 이질적인 두 가지 악기군 을 동시에 섭렵했던 것이다. 예컨대 중국의 신경교향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활동하면서 신경 취주악단에서는 호른을 불었고 광복 후에도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비올라, 호른 주자로 활동하는 한편 때로는 색소폰도 불었는가 하면 대학에서는 관악합주 지휘와 트롬본,튜바,바순,비올라를 개인지도 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아 언제나 묵묵히 자신의 일에만 열중함으로서 참으로 겸허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재옥은 1913년 5월 18일 경상남도 남해에서 태어나 충무에서 유아기를 보냈다. 그의 집안은 통영의 명문으로 부친은 당시 관직에 있었는데 아버지의 근무지가 자주 바뀌는 바람에 이재옥은 전남 광양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통영과 목포를 거쳐 순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그의 교육환경은 학교생활에 정을 붙이지 못하게 되었고 또 공부보다는 ‘끼’있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지 정규 중학교의 진학을 포기하고 말았다. 당시 이재옥의 집안에 특별한 음악과 관계된 사람도 없었고 아버지는 국악에 조예가 있었지만 양악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그런데 순천초등학교 선생님 가운데 한 분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보고는 어쩐지 바이올린이 하고 싶어 아버지를 졸라 바이올린을 구입한 것이 16세 때였다. 또 한편으로는 순천교회의 음악지도자였던 강기반 선생으로부터 각종 관악기 주법을 배우게 됨으로써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독학으로 연주법을 익힌 바이올린과 더불어 이미 10대 때인 1930년대 초에 현악기와 관악기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갖게된 것이다.그의 술회에 의하면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각종 음악회에서 공개연주를 하는 등 음악활동의 영역을 넓힘으로써 이때부터 이재옥은 본격적인 음악공부를위해 일본 유학의 길을 찿기 시작했고 강기반 선생님이 부모님을 설득해 1934년 일본 동경음악학교 선과에 입학하게 되었다.이때부터 동경음악학교 선과를 거처 연구과 1년을 수료하기까지 그는바이올린을 전공하면서 부전공으로는 호른을 택해 관악에도 상당한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음악속에 깊숙이 빠져들면서 음악예술에 대한 새로운 감동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을 때 마침 일본에서 연주회를 가진 당대의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에프럼 짐발리스트와 작크 티보 그리고 미샤 엘만의 연주회를 차례로 접하면서 연주가로서의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게 되었다.특히 그 가운데서도 짐발리스트가 3B 즉 바흐,베토벤,브람스의 작품을 연주한 무대는 평생을 두고 그에게 깊은 감동으로 남아있다.음악학교 재학 중인 1936년에는 조선일보 주최 음악콩쿨에 나가 바이올린부에서 2위로 입상하였는데 이때 1위는 문학준이었고 학교를 대표해서 공개연주를 하기도 했다. 학비는 집에서 보내주고 있어 스스로 돈을 벌 필요는 없었으나 그는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면서도 동경취주악단에서는 바리톤 주자로 활동, 무대의 영역을 넓히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38년 연구과 1년을 수료한 그는 당시 만주국 신경음악 원장인 오쓰카 준(전직 동경음악학교 교수)의 요청으로 신경음악원에 취직했고 신경 교향악단에서는 바이올린 주자로 신경취주악단에서는 유포늄을 불면서 광복을 맞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국인 단원이 이재옥 한 사람 뿐이었지만 2년 후에는 김동진,안병소,전봉초 등이 차례로 입단하면서 한국인의 음악적 우월성을 과시했고 전쟁 말기에는 다시 김성태와 김생려를 비롯한 한국의 음악가들이 대거 입단해서 교향악단 생활을 함께 했다. 한국인 단원은 특히 친하게 지내며 나라 걱정도 함께했는데 특히 선배인 김성태는 그 후 귀국해서도 이재옥을 항상 이끌어 주어 평생의 은인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조국이 해방되자 이재옥은 만주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1945년 9월 서울에 도착했으나 갑자기 갈 곳도 없어 첫 날밤을 수용소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그 이튿날 찾는 이가 있어 나가보니 김성태가 수소문해서 찾아왔고 김성태의 주선으로 한국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에서 호른 수석을 맡아 국내 활동을 시작했다. 물론 당시 교향악단에서도 단원들을 필요로 했지만 수용소까지 찾아온 김성태의 배려는 갈 곳 없는 그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그시기에 일찍이 바이올린과 비올라 그리고 호른을 비롯한 관악기 전반에 통달하고 있던 이재옥의 역할은 광복 후 한국악단 재건에 큰 힘이 되었다. 고려교향악단에서 호른 수석으로 활동하던 그는 1946년 10월부터는 서울관현악단으로 자리를 옮겨 대중과 좀더 친근한 연주 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색소폰을 맡기도 했다.
  1948년 서울관현악단을 중심으로 새롭게 창단한 서울교향악단에서는 제2바이올린 수석과 때로는 호른도 맡아 1인 2역을 하며 서울교향악협회 이사로도 활동하는 가운데 6.25 한국 전쟁이 발발 했다. 교향악단의 활동도 중단되자 이재옥은 육군군악학교 교관으로 일하면서 육군교향악단의 악장을 맡아 오케스트라를 계속했고 이때 차이코프스키의 발레음악 <백조의 호수>연주회에서는 2막의 아다지오 부분에서 독주 바이올린을 이재옥이 맡고 첼로는 전봉초가 맡아 열연함으로써 이때의 흥분된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전쟁도 끝나고 육군군악학교 폐교와 더불어 육군교향악단도 해산하게 된 1955년,김성태와 전봉초의 주선으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기게 됨으로써 이재옥은 교수로서 새로운 음악생활을 시작했는데 어떻게 보면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새로운 일자리가 나타나 자연스럽게 음악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이재옥은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서울음대에서는 비올라를 지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관악부의 총책임자로 바순,호른,트롬본,튜바,색소폰도 함께 지도했고 관악합주의 지휘까지 겸해 한국 관악계의 대부로서 관악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이처럼 서울음대 교수로 있으면서도 아울러 1956년부터 60년까지는 KBS교향악단의 비올라 수석으로 다시 1961년부터 73년까지는 서울시향의 비올라 수석을 겸임함으로서 한국의 양대 교향악단 비올라 수석을 차례로 지내기도 했다.1972년에 박민종,전봉초,서순정과 함께 창단한 서울대 4중주단의 비올라를 맡아 실내악운동에 힘을 쏟았고 서울대관악합주단의 지휘자로 레스피기의  <로마의 소나무>,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거쉰의<랩소디 인 블루>등 수많은 곡들을 관악합주로 한국에서 초연했다.
1973년부터 83년까지 관악지도자협회 회장을 역임한 이재옥은 서울음대 교수로 재직 중에도 연세대,이화여대,숙명여대,단국대 등에 출강했고 1978년에 정년으로 서울음대에서 물러난 후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아 목원대학교 음악학부 초빙교수와 학부장을 지냈는가 하면 정년 후에도 서울대 강사로 계속해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그는 결코 자신을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않았지만 1978년에는 국민포장을 1988년에는 다시 보관문화훈장을 정부로부터 수여 받았다.
  관악기에 대한 이론적 연구에도 깊은 관심을 가짐으로써 관악기와 관련된 3편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한 이재옥은 특히 후반의 삶을 관악발전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고 하겠다. 사람과 부딪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그의 담백한 성격은 혼자 할수 있는 낚시라든가 자전거타기를 즐겨했고 술 맛은 알지만 술을 많이 먹지는 않아 언제나 절제된 생활태도를 지켰다. 직계 제자가 아니면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반말을 쓰지 않는 겸손함과 예의로운 몸가짐은 그만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슬하의 2남 1녀가 모두서울음대에서 음악을 전공해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는데 큰아들 이정생은 트롬본을 전공 ,서울시 교향악단의 수석단원으로 활동하고있으며,둘째 아들 이정훈은 비올라를 그리고 딸은 작곡을 전공,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남들은 한 가지 일만 가지고도 힘들어하며 일생을 통해 일가를 이루기가 쉽지 않은데 이재옥은 바이올린,비올라,호른,색소폰 등 4가지 악기로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활동을 했는가하면 현악4중주단에서는 비올라를 맡아 실내악운동에 앞장섰고 관악합주단의 지휘자로 수많은 작품을 한국에서 초연했을 뿐 아니라 대학에서도 비올라와 바순,트롬본,오보에,튜바,색소폰의 전공지도를 했으니 감추어진 그의 열정과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항상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정신과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이재옥의 모습은 겸허속에서도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어 많은 이들에게 귀감을 주고 있다.
<한상우선생의 글을 전문 인용 하였습니다>
윤왕로 씀.




2006년 9월 6일 서울음대 관악동문회 제8회 관악합주 연주회 사진1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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